디자이너, 정치를 말하다.
2006년 12월 28일(오프닝 행사 : 7시부터), 대학로에 위치한 국민대학교 제로원 디자인센터에서 <정치 디자인, 디자인의 정치> 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린다. 이 전시에서는 ‘디자인’이라고 하면 쉽게 연상되는 첨단 기술의 자동차라든가 매끈한 전자제품, 혹은 예쁜 문구류나 인테리어 상품 등을 볼 수는 없다. 벽면을 가득 메운 줄글과 강렬한 이미지의 북한 집체극 사진, 신문에나 나올 법한정치가들과 낡은 역사책에서 끄집어낸 듯한 느낌의 정치가 사진으로 만든 포스터 등이 이 전시가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다.
하필 왜, 그리고 지금 정치에 대해서 발언하는가.
기획자들은 디자인의 최전선은 현란하고 화려한 상품들이 경쟁을 벌이는 세계 시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국적 기업이 국제 시장에서 승승장구한다고 해서 ‘여기’에 있는 ‘나’의 삶이 꼭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디자이너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일은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정치적인 힘을 파악하고, 어떻게 해야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을 억압하는 일상의 권력과 싸울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 기획자들의 주장이다.
하나의 시선을 강요하지 않고, 삶 속에서 자신이 느끼는 ‘정치’와 ‘정치성’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이 전시의 기본 개념이다. 꼭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동시대를 공유하는 다양한 작업자들의 시각이 오히려 디자이너들에게 더욱 유효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가 아닌 이들의 디자인 전시.
그래서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면면은 굉장히 다양하다. <기계비평>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기계문명을 바라보는 인문학자의 시선을 보여주는 사진평론가 이영준, <근대의 책읽기>,<끝나지 않는 신드롬>,<혁명과 웃음>(공저) 등 문제작들을 잇달아 내놓아 주목받고 있는 문화 연구자 천정환, 과거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로 활동했던 예술비평가 임근준, 유럽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명성을 얻고 있는 아티스트 양혜규, 평택 대추리에 ‘위장전입’한 후, 사진관을 열어 미군기지 이전으로 인해 뿔뿔히 흩어질 대추리 사람들의 기념사진을 찍어 주는 작업으로 유명한 다큐멘터리 사진가 노순택 등이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 혹은 ‘정치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신의 매체를 통해 직접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물론 <한국생활사박물관>으로 2004년 백상예술대상 편집부문 대상을 수상한 편집디자이너 김영철과 세로쓰기 글씨체 ‘꽃길’을 비롯하여 90여개의 한글 폰트를 디자인한것으로 유명한 글자 디자이너 이용제, 분당의 대안학교인 <이우학교> 프로젝트에서 학교에서 사용되는 모든 것들을 좀더 아름답고 편안하게, 그리고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디자인해서 화제를 모았던 이정혜 등굵직굵직한 젊은 디자이너들의 작품들 역시 눈길을 끌고 있다.
또한 디자인사회연구소장 권혁수, 공공미술추진위원회 상임위원 겸 사무국장 최범 등 우리 디자인계의 ‘원로’들도, 정치와 디자인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모색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디자인계 안과 밖이 소통하는 전시를 만든다.
이 전시는 한국 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고, 베가스튜디오가 기획, 주최한다. 디자이너 이정혜와 사진가 김현호가 함께 작업하는 그룹인 베가스튜디오는 <이우학교> 프로젝트와 2005 광주디자인비엔날레 특별전 p3 <한국의 디자인> 전을 진행했다. 또한 상업적인 작업과 더불어 <와우북페스티벌>의 책놀이터 공간디자인을 비롯하여 비영리적이고 공공의 삶을 좀더 낫게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인터뷰 전문 웹진 <퍼슨웹>의 편집장이기도 한 공동기획자 김현호는 한국 디자인계의 문제 중 하나로 다른 분야와의 의사소통 부족을 지적한다. 디자인이 좀더 풍요롭고, 디자인이 결정되는 프로세스가 좀더 합리적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시스템에 대한 이해와, 사회의 부조리한 지점을 바꿀 수 있도록 시민의 의지와 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시는 2007년 1월 21일까지.
내용이 충실한 도록도 선보여.
작품 사진과 설명, 간단한 기획글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전시 도록과는 달리, <정치 디자인, 디자인의 정치> 전은 총 272페이지의 묵직하고 충실한 도록을 만들었다. 연구자들의 심도 있는 글과 작가들의 작품론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이 도록은, 출판사 청어람미디어를 통해 일반 서점에도 동시에 배포될 예정이다. 북한의 ’거대 정치 스펙타클’인 <아리랑 집체극>을 사진찍은 노순택의 작업과, ‘빨갱이’라는 말의 역사와, 거기에 담겨 있는 정치적 폭력성을 분석한 천정환의 글이 눈에 띈다. 정치적 미술의 연대기적 흐름을 분석한 임근준의 글과 장쩌민의 의자와 마오 쩌둥의 의자 디자인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읽어내는 이영준의 글 역시 예리하다. 전시의 공동기획자이면서, 전시 디자인과 도록 디자인을 맡은 디자이너 이정혜의 파격적인 디자인 솜씨도 빼놓을 수 없다. (문의 : 청어람미디어, 전화 : 02-3143-4006 팩스 : 02-3143-4003 )
문의 : 베가스튜디오 (02-338-3440), 기획자 김현호(011-779-5865)
fax 02-338-3410, www.vegastudio.co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민대학교 제로원디자인센터, 청어람미디어
협찬 : 월간 디자인네트, 월간 아트 인 컬처, 문화기획 퍼슨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