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에 누가 ‘공포’를 칠했나 ‘정치디자인…’展
라틴어 디세뇨(disegno)를 어원으로 하는 디자인(design)은 본디
넓은 의미의 조형계획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디자인은
상품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포장술로 인식되어 왔다.
우리 디자인사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한국디자인포장센터는 설립된
1970년대 당시 디자인과 포장이 의미 구분 없이 사용됐음을 보여준다.
또한 대통령의 지시로 해외시장에서 더욱 많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설립됐다는 목적으로부터 일견 정치와 무관해 보이는 디자인이
어떻게 정치적 함의를 담아내고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데
이바지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서울 대학로 제로원 디자인센터에서 지난달말 시작된
‘정치디자인, 디자인의 정치’는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생활의
여러 시각이미지 속에 은폐된 정치적인 기호를 읽어내고 이로부터
디자이너들의 각성을 요구하는 전시다. 기획자 김현호씨는
“디자인에 결여된 정치적 측면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밝혔다.
이영준 ‘체어맨 마오의 의자’
이 전시는 주제뿐 아니라 몇 가지 측면에서 흥미롭다. 전시에는
미술 평론가, 문학 연구자, 디자인 운동가, 서체 디자이너, 편집 디자이너,
디자인 평론가, 작가 등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는 14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미지를 통해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또 ‘전시 따로, 평론 따로’식의
전시관행을 탈피하고 단행본 형태로 출간된 도록
‘정치디자인, 디자인의 정치’(청어람미디어)에 실린 평론가들의
글도 설치의 형태로 전시했다.
전시는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이미지 속에 반영되고 나아가
이미지가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이마골로기(imagologie)로
변모해 가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빨갱이’라는 단어다. 전시장 바닥에 다양한 채도의 빨간색 종이 위에
‘빨갱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신문기사를 크게 확대한 작업은
30년대만 해도 시에서 그저 빨갛다는 의미로 사용되던
‘빨갱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살핀
문학 연구자 천정환씨의 글을 시각화한 것이다. 비평가 이영준씨는
‘체어맨 마오의 의자’라는 글에서 72년 마오쩌둥이 닉슨 대통령과
만나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과 장쩌민이 라이스 장관과 앉아 환담을
나누는 사진을 비교하면서 한낱 의자가 어떻게 말없이 국가 권력을
표상하는지 분석했다.
노순택 ‘카드놀이’
작가들의 사진작업도 흥미롭다. 고현주씨의 ‘기관의 경관’은
국회의사당 로비, 대검찰청 대회의실, 대법원 대법정 등
국가 권력기관의 실내 풍경을 촬영한 사진으로, 가구와 집기물,
벽면 장식물 등 평범한 일상용품 속에 어떤 식으로 정치적 권위와
권력을 표현하려 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70년대 새마을운동과 북한 천리마운동의 선전 이미지를 보여주는
디자이너 김미영씨의 작업은 남북한의 이마골로기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사회주의 예술론을 채택한 북한의 천리마운동 포스터는 밝고 희망찬
미소를 띤 노동자들을 그려넣고 영웅적인 면모를 강조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 관련 이미지들은 노동자 개인보다는 함께
협업하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대부분 경제발전을 상징하는 공장이나
고속도로, 정리된 농경지를 보고 감탄하는 뒷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밖에 정치성이 강한 사진작업을 하는 노순택, 조습씨 등의
사진이 전시중이다.
21일까지. 입장료 2000원 (02)745-2490
<출처_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