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로가 ‘임자’ 만났다. 대학은 없고 소비문화만 판치던 자리. 이제야 이름값 되찾은 모양새다. 2000년 이후 둥지 튼 곳만 12곳. 공연예술·디자인 관련 학과를 위한 ‘작은 캠퍼스’들이 대학로로 모이는 이유는 뭘까? >
서울 대학로, 정확히는 종로구 동숭동 일대에 성균관대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말고 또다른 대학이 있냐고 반문하기 쉽다. 사실 대학로는 ‘붕어빵’이었다. 붕어빵에 붕어가 들어 있지 않듯, 대학로도 이름과 달리 대학은 없고 소비문화만 판치는 카페거리란 비판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모르시는 말씀. 정답부터 말하면 지금 대학로에는 대학이 무려 16곳이나 있다. ‘유흥’이 즐비했던 젊음과 연극의 거리 대학로가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대학이 찾아든 자리에는 이전 대학로와는 다른 새로운 청년 문화가 번져가기 시작한다. 아직 변화는 진행중이지만, 속도는 점차 빨라지는 양상이다.
1. 다시 모여드는 대학들
대학로에 대학들이 몰려오는 것을 가장 먼저 감지했을 이들은 연극팬들이다. 각 대학 연극영화과들이 연극의 거리 대학로에 공연장 겸 별도 캠퍼스를 경쟁적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대학로에 먼저 관심을 갖고 별도 캠퍼스 공간을 두기 시작한 쪽은 디자인 쪽이었다. 1996년 한국디자인진흥원이 국내 최초의 국제디자인대학원대학교(IDAS)를 설립했다.
이어 2000년 '국민대'가 아르코예술극장 부근에 ‘01(제로원)스튜디오’를 열었다. 이 '국민대' 디자인 스튜디오는 2004년 ‘제로원(01) 디자인센터’로 확대된다.
* 위 사진 : 10시방향의 사진이 국민대학교 제로원(01) 디자인센터(www.zeroonecenter.com) 이다 (교학팀 주)
* 아래 사진 : 국민대 제로원(01) 디자인센터는 4호선 '혜화역 1번' 출구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동숭아트센터' 바로 오른쪽에 있다 (교학팀 주)
이듬해인 2001년에는 공연예술 분야 대학들이 대학로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선 상명대가 학산기술도서관을 인수해 동숭캠퍼스를 열었다. 사진학과·영화학과·실내디자인학과 등 9개 학과 대학원생들을 위한 소극장과 전시장으로 시작해, 현재는 디지털콘텐츠와 문화경영 등을 아우르는 12개 학과 문화예술대학원으로 커졌다. 같은 해 중앙대도 우당기념관을 사들여 공연영상예술원을 열었고, 동덕여대는 건물을 신축해 공연예술학부를 이곳으로 옮기고 실습전용공간으로 쓰고 있다. 전주 우석대도 2002년 대학로에 우석레퍼토리극장을 개관했다.
2000년대 초반 공연예술계 대학들의 1차 이전 붐에 이어 최근에는 다시 여러 대학들이 속속 대학로로 들어오고 있다. 2002년 한국디자인진흥원 건물을 인수해 대학로에 대학 캠퍼스를 연 홍익대는 2004년 대학로의 국제디자인대학원대학교를 인수했고, 현재는 지상 15층 지하 6층 규모의 대학로 캠퍼스 디자인센터를 짓고 있다. 2011년 이 건물이 완공되면 홍대의 간판 분야인 디자인 계열의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과 주요 디자인센터들이 여기로 옮겨와 대학로 시대를 맞게 된다.
공연 쪽 대학들도 최근 다시 대학로로 돌아가고 있다. 2006년 충남의 청운대가 대학로 공연예술센터를 열었고, 서경대는 200억원대의 건물을 사들여 극장 4개 규모의 공연 단지를 짓는다. 이 밖에 전북의 예원예술대와 전북과학대 등도 대학로에 실습실을 따로 마련해 운영중이다.
2. 왜 대학로인가?
2000년대 이후 대학로에 교육 공간을 마련하며 새로 들어온 대학은 12곳에 이른다. 다른 지역이 아니라 대학로란 특정한 지역에 대학들이 들어서는 데에는 물론 이유가 있다.
우선, 소극장을 중심으로 한 공연의 메카이기 때문이다. 공연 분야 대학들로선 당연히 공연문화의 최전선인 이곳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대학로는 문화 이미지가 강하고, 유흥 지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트클럽·유흥주점 등이 없어 다른 소비지역과는 다르다고 본다. 지방에 있는 대학들이 서울에 마련하는 근거지로 대학로를 선호하는 것도 이런 이유로 볼 수 있다.
최정일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는 “대학로에는 120여개의 소극장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데, 세계 어디에도 이런 곳은 없다”고 말한다. “현장 예술인들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학생들이 보다 손쉽게 현장 진입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로에 있는 공연예술 대학들은 대학로에서 활동중인 프로 공연예술인들을 강사로 초빙해 학생들의 연기 지도를 시키고 있다. 또 학생들이 만드는 공연을 무대에 올려 쉴 새 없이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디자인 쪽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는 대학로가 디자인의 중심지와는 거리가 있지만 대학들은 대학로가 디자인 메카가 될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학로는 여러 화랑들과 미술관들이 자리잡은 미술의 거리이기도 한데, 여기에 디자인이 들어가 복합 상승작용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대학로에 디자인이 들어가 종합문화예술 지역으로 발전할 본격적인 계기가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김철호 홍익대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원장은 “젊은 문화예술의 중심지인 대학로의 문화적 환경을 배경으로 활용하고 다양한 문화 영역과 시너지를 발휘해, 새로 시작하는 대학로 캠퍼스를 디자인 메카로 키워나가려 한다”고 대학로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3. 변화 심했던 대학로
서울 대부분 지역들 중에서도 대학로는 거리의 성격이 여러차례 변해온 곳이다.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학문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동네 이름도 가르침을 높이 여긴다는 뜻의 숭교방(崇敎坊)이었고, 오늘날 동숭동이란 이름도 숭교방의 동쪽이란 뜻으로 생겨났다. 이 지역에 가장 먼저 들어선 교육기관은 조선 개국과 함께 문을 연 성균관이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인 1924년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대학로란 이름이 나오는 배경이 된다.
오랫동안 서울대가 이곳에 위치하면서 대학로는 문화의 거리로 자리잡아 갔다. 대학생들은 지금은 콘크리트로 덮힌, 청계천의 지류인 대학천과 그 위를 가로지르던 다리를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의 시구에서 따 ‘세느 강’과 ‘미라보 다리’라 했다. 1956년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학림다방은 ‘제25 강의실’이란 별칭으로 이르기도 했다. 통기타와 저항을 상징으로 여기던 70년대까지 대학로 일대는 청년 문화의 중심지이자 군사독재 정부에 맞서는 시위의 중심지였다.
대학로에 거의 전면적인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75년 서울대가 의대만 남기고 관악산 기슭으로 옮겨가면서다. 대학의 거리에서 대학이 떠난 것이다. 대신 대학로를 찾아온 새로운 이주민은 바로 연극계였다. 명동과 신촌 일대에 모여있던 극장들이 임대료가 싸고 교통이 편한 이곳으로 오면서 대학로는 그 성격이 완전히 바뀐다. 대학로는 연극의 거리가 된 동시에 유흥과 소비의 거리로도 변했다.
1985년 정부는 이곳에 대학로라는 새 이름을 붙이고 주말에는 차량 통행을 막는 차 없는 거리로 개방했다. 그러나 예상 이상으로 많은 10대 청소년들이 이곳으로 몰려왔고, 일탈을 일삼는 해방구가 되기도 했다. 결국 1989년 정부는 차 없는 거리 정책을 포기하고 환경개선 사업을 펼쳐 마로니에 공원 활성화에 나선다.
주말이면 고성방가로 시끄럽던 대학로는 90년대 들어 한층 차분해졌고, 공연예술의 메카로 정체성이 더욱 뚜렷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유동인구가 늘면서 상업성도 심화되어 갔다. 대학로의 임대료가 올라가면서 문화 업종은 비싼 임대료에 밀려나고 카페와 식당, 술집들이 그 자리에 들어오는 순환이 이어졌다.
4. 새로운 계기 맞나
이제 대학로는 또다른 변신의 기회를 맞고 있다. 대학들이 새로운 식구로 들어오면서 문화와 소비 양쪽에서 모두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장혜숙 상명대 문화예술대학원장은 “대학로는 동서남북이 열린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어 쉽게 모이고 쉽게 나갈 수 있다”며 “이미 충실한 기성 문화계의 네트워크에 학생들이 접속되면서 더욱 활성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정일 중앙대 교수는 “학생들의 독창적인 창작이 대학로 문화에 섞여들고, 동시에 전문가들 또한 현장 중심적으로 움직이게 되면서 시너지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젊은 문화는 축제의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대학들이 속속 대학로에 집결하면서, 대학로를 대표하는 축제로 매년 거듭나는 대학로문화축제(SUAF)가 지난해 7회째 열렸다. 대학 문화의 부재를 반성하는 대학생들이 스스로 만들고 누리는 잔치판이다. 이들은 “대학생들이 문화의 주체가 되기보다 상업주의의 결과물을 답습하는 문화의 수용자가 돼버렸다”며 “대학생들에 의한 대학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대학 문화의 자생력을 생성하는 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축제의 의미를 설명한다. 이 밖에도 전국 대학 연극과 학생들의 축제인 ‘젊은 연극제’가 10여년째 열리고 있고, 대학생과 예술가, 지역 주민들이 함께하는 축제들이 연중 개최된다.
산업적 측면에서도 대학로는 국내 기업들의 디자인센터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대학로에서 육성되는 무수한 디자이너들이라는 인재 풀, 젊은이들의 변화무쌍한 트렌드를 잘 파악할 수 있는 이점 등이 마련돼 있어, 여기에 디자인 전문회사들까지 결합한다면 시너지 효과가 더욱 커지리라는 것이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원문) 한겨레신문 2009.3.12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newspickup_section/343823.html